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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 것들의 백과사전

Archive for the '전쟁' Category

하일 시클그루버

아돌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의 하급 세관원의 세 번째 결혼에 의해 태어난 셋째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사생아였으며 그는 처음 39년간의 생애 동안 어머니 성인 시클그루버를 그대로 써왔다. [중략] 아돌프의 조부인 요한 게오르크 히틀러는 떠돌아다니는 제분직공으로 이 오스트리아의 저지대 마을을 헤매며 일터를 찾아다녔다. [중략] 1838년 6월 7일, 마리아는 사생아를 낳아서 알로이스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이것이 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가 된 것이다. [중략] 어쨌든 요한은 결국 그 여자와 결혼했으나 일반적인 관습과는 달리, 결혼 후 자식을 인지하는 법적 수속을 밟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는 알로이스 시클그루버로 자랐다. 안나는 1847년에 죽고 그로부터 30년간 요한 휘틀러는 자취를 감췄다가 84세가 되어서 발트필테르의 바이틀러촌에 다시 나타날 때까지 행방불명이 됐었다. 그리고 성도 이때는 Hitler로 바꾸고, 3명의 증인을 세우고 공증인 앞에서 알로이스 시클그루버의 아버지라고 증언했다. [중략] 어쨌든 이 뒤늦은 인지는 1876년 6월 6일에 있었고, 11월 23일에 공증된 인지서의 송달을 받은 데렐샤임의 성당 주교는 세례자의 대장에서 알로이스 시클그루버의 이름을 지우고 대신 알로이스 히틀러의 이름을 기입했다. 그때부터 아돌프의 아버지는 법률적으로 알로이스 히틀러로 알려지고, 물론 그 이름은 아들에게도 전해졌다. [중략] 나는 히틀러가 시클그루버로서 세상에 알려졌더라면, 독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까 하고 독일인들이 얘기하는 것을 가끔 들었다. 시클그루버라는 말이 남부 독일인의 혀꼬부라진 소리로 발음되면, 약간 우스운 느낌을 주게 된다. 열광한 독일 대중이 우뢰 같은 함성을 지르며 시클그루버를 하일 하고 환호할 수 있을까. 하일, 시클그루버라고 할 수 있을까. <하일 히틀러>는 거대한 나치스 집회의 신비로운 야외극에서 대중에 의해 바그너식의 이교도적 찬가로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마침내 제3제국 시기의 독일인들의 의무적으로 나누는 인사의 형식이 되었으며, 전화에서도 종전의 여보세요를 대신하기까지 했다. 하일, 시클그루버-이것은 아무래도 곤란한 이름이다.[제3제국의 흥망1 히틀러의 등장, 윌리엄.L.사이러 지음, 유승근 옮김, 에디터, 1993년, pp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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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오판(誤判), 혹은 거짓말

수백만의 독자를 가진 지의 비버브룩경은 ‘뮌헨의 거짓말’에 대한 가장 확실한 옹호자였다. 1938년 5월 28일 신문 1면의 기명 칼럼에서 그는 “영국은 전쟁에 휘말리지 않을 것이다. 금년이나 또는 그 다음 해에도 유럽에서 큰 전쟁은 없을 것이고 독일인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업무에 돌아가라. 두려워하지 마라”고 역설했다. 뮌헨 항복 다음날 의 1면 제목은 2인치 크기로 뽑은 ‘평화’라는 단 한 단어였다.[제임스 레스턴 회고록 데드라인, 제임스 레스턴 지음, 송문홍 옮김, 동아일보사, 1992년,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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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의 모병(募兵)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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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대전 동안 모든 진영은 포스터를 이용해서 전쟁에 보충하기 위한 인구를 늘리려고 노력했다. 호주는 그들의 “모국”인 영국을 위해 싸웠다. 호주는 갈리폴리와 서부전선에서 막대한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들은 그러한 피해를 보충하기 위해 위와 같이 익명의 화가가 그린 포스터를 제작했다.[링크]

 

“호주는 5만 명 이상을 영국에게 약속했습니다. 우리가 그 약속을 지키게 도와주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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